제대로 된,쓸모 있는 서울 어린이.청소년인권조례(가칭)제정을 위한 인권시민사회단체 공동 의견서

제대로 된,쓸모 있는 서울 어린이.청소년인권조례(가칭)제정을 위한 인권시민사회단체 공동 의견서

바야흐로 ‘인권조례’의 바람이 불고 있습니다.전국 광역.기초자치 단체들이 앞을 다퉈 인 권도시 선언이나 인권 기본조례 제정 등을 추진하고 있으며,이미 12곳은 제정을 완료한 상 태입니다.서울시 역시 201년 서울시민권리선언을 시작으로 인권을 제도화하려는 움직임에 박차를 가하고 있습니다.서울 인권기본조례는 이미 입법 예고(2012.5.10)에 들어갔고,노숙 인 권리장전이 일주일 전 발표되기도 했습니다.여성,장애인,어린이.청소년 등 각 권리 주체별 조례들이 용역 사업 등을 통해 줄지어 추진되고 있기도 합니다.

인권의 보편성을 확장하고,시민의 인권을 보장하고 옹호해야할 의무가 있는 지자체들이 되 레 인권 사안을 외면하거나 탄압했던 순간의 기억들이 아직도 생생합니다.과거의 기억이 아닌 여전한 현재로 남아있는 사안 역시 수두룩합니다.이제라도 인권에 기반을 둔 행정 체 계를 갖추겠다는 지자체의 약속이 한 편 반갑기도 하지만,그것의 진짜 얼굴이 무엇인지 의 구심이 들기도 합니다.제 몫을 갖지 못했던 존재들이 인권의 무대에 등장하는 과정엔 언제 나 사회적 긴장과 갈등이 뒤따르게 마련입니다.그렇기에 인권의 얼굴은 그리 말끔하지도, 우아하지도 않습니다.외롭고,지난한 싸움을 몸서리치게 겪고 나서야 비로소 한 걸음 내딛 을 수 있었던 것이 인권의 역사였습니다.때문에 인권선언이나 인권조례가 별다른 ‘잡음’없 이 빠르고,조용히 추진.제정.처리되는 것에 오히려 심각한 우려를 갖게 됩니다.당연하고 좋은 말들의 잔치만 벌어지고 정작 잔치의 주인공이 되어야 할 시민들의 열망과 참여를 끌 어내지 못한다면 인권의 이름으로 인권의 힘을 빼앗아버리는 모순된 현실에 맞닥뜨리게 될 것입니다.

인권의 제도화가 필요하지 않다거나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입니 다.그러나 인권조례가 살아있는 언어가 되고,실질적으로 시 행정 및 집행에 영향을 미치기 위해서는 원칙의 선언을 넘어 사회적 논쟁과 합의 과정을 이끌어낼 수 있어야 합니다.어린 이.청소년인권조례(이하 어린이조례)역시 마찬가지입니다.조례 제정 과정 자체가 어린 이.청소년인권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,시민들의 인권 감수성을 향상 시키는 거대한 인권교육의 장이 되어야 합니다.시민들이 목소리를 보태고,입법 과정에 참여할 수 있는 계 기를 충분히 마련해야 현장의 절박함이 담긴 구체적 내용을 만들 수 있습니다.그래야만 조 례의 입법 취지를 살릴 수 있고,특히나 어린이.청소년이 시민적 주체로 설 수 있는 제도 적 문이 열릴 수 있습니다.

1.어린이.청소년을 정책의 대상이 아닌 주체로 설정해야 합니다.

어린이조례의 주인이 어린이.청소년이 되기 위해서는 이들을 정책적 시혜의 대상으로만 설 정하는 우리 사회의 익숙한 프레임을 넘어서야 합니다.어린이.청소년을 미성숙한 존재로 전제하고 일방적 보호를 제공하는 것은 어린이.청소년 스스로 자기 삶의 문제를 결정하고, 책임질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할 뿐입니다.UN아동권리협약에서는 아동을 향한 ‘보호’와 아동

의 ‘참여’를 병렬적인 권리로 나열하고 있지만,현실에서는 보호/양육/교육의 이름으로 어린 이.청소년의 자기결정과 참여를 제약하는 경우가 많다는 점을 직시해야 합니다.‘보호’와 ‘참여(자유)’는 때때로 취사선택할 문제가 아니며,어린이.청소년의 의견을 묻고 반영하지 않은 일방적 보호 조치가 낳는 차별과 폭력을 인권침해로 규정할 수 있어야 합니다.어린이 조례가 어린이.청소년을 본디 무력한 존재로 전제하는 보호주의 패러다임에 갇혀있는 경 우,어린이.청소년의 주체화에 기여할 수 있는 길은 열리지 않습니다.어린이.청소년이 처 한 취약한 구조적 위치를 문제 삼고,합법적으로 박탈된 권리를 회복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자력화 패러다임으로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합니다.

어린이.청소년의 경제.사회.문화적 권리(사회권)실현의 과정에서도 참여는 중요합니다. 특정한 시설이나 서비스를 일방적.일괄적으로 제공하는 것만으로 그 권리 보장의 틀이 완 성되지 않습니다.어린이.청소년을 특정 정책의 수혜자가 아닌 정책의 입안자,제안자로 설 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.

2.공론화의 흐름을 형성하는 것이 속도전보다 중요합니다.

조례는 구속력이 약한 최하위 법령이기 때문에 법적 한계를 갖고 있습니다.그럴수록 중요 한 것이 구체성과 현장성입니다.구체적 규범과 권한을 가질 때,조례를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현장을 만날 때 비로소 그 힘을 발휘할 수 있습니다.서울 학생인권조례가 여러 악 재 속에서도 꿋꿋이 제정되고,학생인권이 중요한 사회적 의제로 부상할 수 있었던 밑바탕 엔 주민발의 과정을 통해 형성한 시민들의 관심과 지지가 놓여있습니다.어린이.청소년 관 련 현장과의 부단한 만남,당사자 주체의 적극적 발굴 없이 조례의 파급력을 기대하긴 어렵 습니다.현재 조례 추진 과정에서 모집하고 있는 아동위원회의 경우도 지금과 같은 속도라 면,단순 의견 청취 및 홍보 동원의 효과 밖에 거두지 못할 것입니다.이미 서울시엔 수많은 조례가 제정되어 있지만,존재조차 알려지지 않은 조례가 대부분입니다.인권조례라면,그 제정과정 자체가 인권을 통해 이루어져야 합니다.시민들 스스로 어린이조례가 자신의 삶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고민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도록 공론화의 흐름을 형성할 수 있 어야 합니다.인권이 제도화되고,시정에 반영되는 것은 중요합니다.그러나 지금과 같은 속 도전으로는 겉포장은 그럴 듯하나 실질적 내용은 비어있는 졸속 조례가 만들어질 공산이 큽 니다.어린이조례의 제정 목표가 어린이.청소년의 인권현실을 실질적으로 개선하는 데 있 다면 조례안을 내실화하는데 힘을 기울여야 합니다.

3.학생인권만으로 포괄할 수 없는 어린이.청소년 인권 영역을 개척해야 합니다.

학생인권만으로 어린이.청소년의 총체적 삶을 설명하거나 지원할 수 없다는 사실은 분명합 니다.서울 학생인권조례는 학생인권 보장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지만,학생인권 그 ‘너 머’를 꿈꾸는 입법 과정이었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습니다.학교라는 공간,학생이라는 정체성만으로 포괄할 수 없는 다양한 어린이.청소년 인권 영역을 발견하고,재조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.어린이.청소년을 둘러싼 우리 사회의 고질적인 차별담론을 넘어서는 법 적.정책적 흐름을 이어가는 과정으로서 어린이조례가 자리 잡을 수 있어야 합니다.

이러한 맥락에서 어린이조례가 단순히 ‘쉽게 풀어 쓴 UN아동권리협약’수준으로 만들어져 서는 안 될 것입니다.그간 척박한 환경에서도 어린이.청소년 권리 증진을 위해 고군분투 해온 이들의 목소리를 담아낼 수 있어야 합니다.조례를 적극적으로 알리고,활용할 수 있는 사람,단위,주체를 찾아내고 조례와 연결시키는 작업이 그래서 중요합니다.가정,양육 및 교육 시설 (보육원 등 아동생활시설,아동보호전문기관,그룹홈,쉼터,어린이집,지역아동센 터,대안학교 등),지역사회(청소년 노동,탈가정/거리생활 청소년),소수자 청소년(다문화, 장애,성소수자,탈북,탈학교,10대 비혼모 등)등 어린이.청소년들의 목소리를 직.간접적 으로 들을 수 있는 구조적 통로가 열려야 합니다.제정 과정 자체가 침묵이 강요되고,침묵 할 수밖에 없었던 어린이.청소년들이 자신의 인권 현실에 대해 증언할 수 있는 정치적 장 (場)이 되어야 합니다.그래야 비로소 시민들 스스로 어린이.청소년 인권에 대한 문제의식 을 갖고,인권감수성을 점검할 수 있는 구체적 기준으로서 어린이조례가 기능할 수 있을 것 입니다.

4.조례와 연계할 수 있는 법,기관,예산 등에 대한 촘촘한 검토가 필요합니다.

청소년 기본법,청소년활동진흥법,아동복지법,장애아동복지지원법 등 이름을 열거하기 힘 들 정도로 많은 청소년 관련 법률들이 이미 제정되어 있습니다.비단 청소년 관련 법 뿐만 아니라 근로기준법과 같이 어린이.청소년인권 사안과 연계해서 적용할 수 있는 일반 법률 또한 많습니다.문제는 그것이 현장에서 제대로 작동하지 않고,모니터가 어려우며,인권침 해 예방에 기여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습니다.어린이조례가 어린이.청소년 인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법이나 기관의 움직임에 실효성 있게 기여할 수 있도록 탄탄한 준비와 법적 검토가 필요합니다.

특히 어린이조례의 모법의 성격이 있는 서울 인권기본조례와의 관계 설정은 중요합니다.개 별 권리 주체의 조례마다 독립된 집행.구제 기구를 설정하기는 어려운 만큼 인권기본조례 를 통해 설치된 인권센터,시민인권보호관을 공유할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.유명무실한 기구 의 개설과 나열은 어떠한 의미도 낳지 못합니다.현실적인 예산 확보,인력 배치,직무 범위 설정 등을 통해 실질적인 행정적 지원이 이루어질 수 있도록 조례에 명시해야 합니다.

2012.6.19.
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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